Sunday, August 30, 2020

반쪽 선수를 만드는 반쪽 야구에 대해 생각하다 - 서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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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 초유의 ‘지명 철회’ 사태를 바라보며

글쓴이: 권혁웅 스포츠 프리라이터-편집: 고영준 기자

학교 폭력 문제로 시작되어, 결국 구단의 ‘지명 철회’ 선언으로 귀결된 사태의 흐름을 지켜보면서 아연해졌다. 이미 동종 사례로 홍역을 치른 전례가 있음에도, 한국 야구는 그 이후 문제의 본질적 해결에 있어 사실상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전례가 없었던 일에 대해 허둥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한번 전례가 생기면 그로부터 다음 일을 생각해야 한다.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혹은 다시 일어나더라도 상처없이 수습할 수 있도록 대응 방안을 마련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문제의 근본 원인에 대해 생각했어야 했다.

지도자와 학생 사이, 혹은 같은 선수들 사이에서의 폭행으로 일어난 사건이 요 몇 년 사이 알려진 것만 몇 차례나 된다. 드러나지 않은 것을 합치면 더 많을 것이다. 다양한 유형으로, 다양한 연령대에서, 다양한 형태로 피해자에 대해 잔인했던 가해 행각들이 세간에 알려진 바 있었다. 원인이나 유형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한국 야구는 개선을 약속했다. 그런데 이번 사태에 대해서도 전과 똑같이 허둥거릴 뿐이었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피력하던 개선 의지는 그저 말 뿐이었다는 뜻이다.

[아마추어 야구만 비난받아야 할 문제일까]

프로 야구 입장에서 그저 아마추어 야구의 후진성 탓을 할 문제도 아니다. 한국 아마추어 야구는 이른바 세계 상위권 야구 국가들의 아마추어 야구들 중에서도 유난히 국내 프로 야구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가지 예만 들어봐도, 이번 사건에서도 언급된 이야지만, 드래프트를 앞두고 모든 졸업반 선수들은 자동적으로 드래프트 대상자로 지정된다. 드래프트 신청서를 별도로 제출해야 하는 일본 같은 나라와는 다르다. 그 때문에 선수의 품행에 대해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 프로 야구 측의 변명이지만, 프로 야구와 아마추어 야구의 관계에서 얼마나 프로 야구에 편의적인 방향으로 제도가 작동하고 있었는지 여부를 생각해 볼 문제다. 아마추어 야구는 독자적인 영역으로 존재하고, 프로 야구는 그 아마추어 야구에 속했던 이들의 선택지 중 하나라는 일본 같은 나라의 태도와는 달리, 한국은 아마추어 야구가 프로 야구의 전단계이고, 프로 야구는 아마추어 야구의 자동 연장선상에 있다. 아마추어 선수들을 프로 야구 예비군의 동의어, 아마추어 야구를 일종의 직업 훈련 과정 정도로만 생각한 프로 야구나, 그에 대해 별다른 이론없이 종속되어온 아마추어 야구나, 다를 바 없다.

이렇듯 아마추어 야구의 존재 목적과 가치가 프로 야구가 필요로 하는 선수들의 육성과 배출에 온통 집중되어 있으니, 실적과 퍼포먼스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양상, ‘야구 기계’를 만드는 문화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선수들의 진로를 결정짓는 드래프트 제도에 있어서도 선수들의 입장이나 지역 정서와 같은 문제에는 아랑곳없이 구단 편의에 맞춰 제도를 바꾸고 되돌리기를 손바닥 뒤집듯 했다. 쓸모있는 선수만 뽑을 수 있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아마추어 야구를 대해온 것이 한국 프로 야구의 역사다. 한국 아마추어 야구가 ‘야구 기계’ 공장이 되어버린 데 대해, 아마추어 야구 탓만 할 문제는 아닌 이유다.

[선수들에게 ‘야구 기계’를 요구했던 것은 프로 야구와 아마추어 야구, 공동의 과오였다]

이번 사건의 당사자가 된 구단은 이미 다년간 1차 지명 제도에 대한 불만을 표시해왔던 바 있다. 해당 구단이 보유한 연고지 소속 학교에서는 유력한 선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2년 전, 1차 지명 공개 행사석상에서는 지명 선수와 그 가족 면전에서 제도의 불공평함을 토로하며 제도 변경을 촉구했던 바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 상생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10개 구단의 상생은 중요하지만, 구단과 선수의 상생은 중요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해당 선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구단에서 모습을 감췄다. 구단이 필요로 하는 실력과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겠지만,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잘못된 제도, 불공평한 제도 때문에 억지로 데려온 선수 취급받으며 구단의 일원이 되었던 선수에게, 그 구단이 과연 얼마나 제대로 된 관리와 인내를 보여줬을지도 의문스럽다. 이는 해당 구단만의 문제는 아니다. 제도 변경을 이야기하는 구단들마다, 선수들에 대해 정도는 달라도 대우는 거의 같았다. 근거도 마찬가지로 비슷했다. 실력없으니 내보낸 것인데 어찌하겠느냐는 식이었다.

이번 신인 지명을 앞두고 해당 구단은 문제가 된 그 선수에게 굉장히 큰 기대를 보였다. 불공평한 제도, 실력있는 선수가 없는 연고지를 문제삼던 입장에서 오랜만에 좋은 선수가 나왔다고 이야기하며 장밋빛 청사진을 그렸다. 팬들도 기대가 컸다. 하지만 하루도 안되어 모든 것이 바뀌었다. 구단은 몰랐다고 말한다. 그런데 전후 사정을 보면 알았거나, 혹은 알 수 있었던 것도 같다. 어느 쪽이건, 해당 구단은 미래를 걸 만큼 기대가 컸던 선수에 대해 그 정도도 알아보지 않으려 했거나, 혹은 알았다 하더라도 이렇게 문제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실제로 그렇게 이 사건을 바라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2년 전이나 지금이나, 해당 구단은 ‘야구 기계’로서의 선수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을 뿐, 인간으로서의 선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문제다. 실제로 2년 전에는 선수의 마음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올해에는 선수의 품행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선수들에게 접근하면서 구단의 미래를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이후 그렇게 데려온 선수들을 통해 만들어가려고 했던 구단의 미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무리 프로 스포츠가 비즈니스의 논리로 작동하는 산업, 쓸모가 있으면 대접받고 쓸모가 다하면 버림받는 필드라지만, 적어도 인간에 의한, 인간의, 인간을 위한 산업 아닌가. 그런데 이렇듯 인간에 대한 고려와 배려가 배제되어 있다면 이후 전개가 어떻게 되겠는가.

앞서 말했듯 그런 경향은 다른 구단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다. 구단만 그러한가. 팬들조차 어느 구단을 응원하건 크게 다르지 않다. 실력보다는 인성이라고 소리높여 이야기하며 가해 학생과 그 학부모, 지도자와 구단에 이르기까지 비판에 여념없던 팬들이, 하루도 지나지 않아 전국대회 중계를 보며 선수들의 기술과 육체에 대해 견적을 내는데 여념이 없다. 그 선수들은 모두 인간적으로 문제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그들이 말하던 인성은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

이번 사건만 하더라도 세상이 온통 아마추어 야구의 윤리 문제만 거론하고 있다. 선수들의 기술에만 치중해서 인성을 외면하고 ‘야구 기계’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명 철회’ 네 글자로 선을 그은 프로 구단에 대해서는 무려 ‘경의를 표한다’는 발언마저 나오고 있다. 옳은 판단이라는 것이다. 용기있는 결단이었다고도 말한다.

‘야구 기계’를 요구한 프로 야구, 그 요구에 따라 ‘야구 기계’만 만들어온 아마추어 야구, ‘야구 기계’만 만들어온 데 대해 아마추어 야구는 비판받아야 마땅하겠지만, 그 아마추어 야구에 대해 ‘야구 기계’를 요구해왔고 선수에 대해 ‘야구 기계’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던 프로 야구의 구단들은 과연 ‘지명 철회’ 네 글자만으로 ‘경의’까지 받아야 하는 것일까.

[‘야구 기계’를 만들 수밖에 없는 환경에 대한 고려는 왜 보이지 않는가]

개인의 과오에 대해 환경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썩 바람직하지 못하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주변 환경에 대한 고려 없이 개인의 과오만을 문제삼는 것 역시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처사 아닌가 싶다.

아마추어 야구 지도자들에 대한 비난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성적과 실적에 치중하여 선수들의 인성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정할 수는 없는 문제다. 심지어 지도자 자신이 범죄의 주체가 되는 경우도 흔하다. 선수들을 실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에 말을 듣지 않는다고 손을 대고 모욕을 가하고 괴롭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문제들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는 이야기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엇을 먼저 바꿔야 하는지, 이에 대한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추어 야구 지도자들이 실적, 성적 지상주의에 매몰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선수들의 성적, 그에 의한 자신의 실적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추어 지도자들의 직업적 지위는 하나같이 안정되어 있지 못하다. 계약직이고, 급여의 출처 또한 안정되어 있지 않다. 감독, 코치로 현장에서는 권위가 있을지 모르지만 직업의 세계에서는 언제라도 실업자가 될 수 있는 것이 그들의 현실이다. 그 자리에서 살아남으려면 계속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극히 한정되어 있다.

세상은 선수들의 인성과 품행을 중시하는 지도자를 원한다고 하지만, 프로와 대학 입시 전형에서는 그런 부분들이 반영되고 있지 않다. 윤리 시험 성적이 학생의 인성과 품행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처럼, 대회 성적과 실력 또한 다를 바 없지만, 그에 대한 고려가 없다. 당장 드래프트에 있어 선수들의 장래 가능성이라는 측면을 고려한다는 프로에서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결국 선수들의 현재 기술과 육체에만 신경을 쓰는 판이다. 그런 프로의 요구에 맞춰 일정이 정해지고 제도가 바뀐다. 대학의 요구 또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출전 경기 수와 실적이 대부분을 결정하는 판이다. 그런 일방적인 구도 따라가기도 바쁜 와중에 선수들의 정신에 대해 일반 지도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성적을 희생하더라도 인성과 품행을 추구하라, 이상적인 이야기다. 지도자들 중 일부는 자신의 이상을 좇아 실제로 그렇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자발적인 희생과 양보, 혹은 비범한 역량이 만들어내는 예외일 뿐이지, 전체에 강요될 규율일 수는 없다. 개인의 희생과 양보가 없이는 모순을 해결할 수 없는 제도, 비범한 개인만이 모두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제도, 그런 제도가 존재가치가 있을까.

매번 같은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개선을 다짐하던 한국 야구, 하지만 그 다음 똑같은 사건이 발생할 때 한국 야구는 또다시 개선을 다짐할 뿐이었다. 매번 개인의 과오만 탓할 뿐, 그 과오를 조장한 제도에 대해 이렇다 할 생각이 없었기에 그런 반복이 있는 것 아닐까.

[반쪽 선수를 만들고 싶지 않다면 반쪽 야구에서의 탈피부터 생각해야 한다]

최근 프로 야구에서는 선수 육성과 관련하여 ‘반쪽 이론’이 유행하고 있다. 일정한 단계를 거쳐서 일정한 경지로 완성된 선수들이 기회를 받아야지, 성급한 기용은 선수를 ‘반쪽’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반쪽’이란 온전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선수가 인간이 아닌 ‘야구 기계’로 취급받는 것 또한 ‘반쪽’에 다름없을 것이다. 선수들은 분명히 야구 기술과 그 기술을 구현하기 위한 육체의 결합체에 앞서, 야구가 좋아서 야구를 시작했고, 야구를 통해 인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정신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인간을 배제하고, 오직 기술과 육체만을 추구한다. 그것도 프로 야구, 아마추어 야구, 그리고 그 야구들을 소비하는 일반 팬들의 요구에 따라, 살아남아야 하는 지도자와 선수들 모두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 한국 야구계 일반의 요구로 인해 그런 식으로 작동했던 아마추어 야구와 그 속의 인간들은 이제 ‘야구 기계’라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반쪽 선수를 요구하여 반쪽 야구를 만들어 놓고, 이제는 그 반쪽 야구를 향해 반쪽 선수들을 내놓는다고 탓하는 셈이다.

한국 야구인들이 그런 비판을 자초한 점에 대해 변호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비판과 함께 좀더 생각해야 하지 않나 싶다. 무엇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가, 왜 개선되지 못하고 같은 일들이 반복되는가, 분노와 질책, 그 다음 행보가 없는 세상의 반응은 무엇 때문인가.

지도자들이 학생 선수들을 ‘야구 기계’가 아니라 야구를 통해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으로 대우할 수 있게끔 할 방법, 학생 선수들이 학생과 선수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지 않고 학생이자 선수로, 그리하여 그들이 프로에 가더라도 선수이기에 앞서 인간이라는 점을 잊지 않을 수 있는 방법, 나아가 세상 또한 그 선수의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 그에 대해 얼마나 생각했었는가.

현상에 대한 분노와 질책은 그 현상에 국한될 뿐, 다음 순간에는 선수들의 기술과 육체에만 치중하여 그 속에 있는 정신을 외면하는 행태를 반복하지 않았던가. 야구라는 이 필드에 어떤 형식으로라도 발을 걸치고 있는 이들이라면 그런 반성을 한번쯤은 해야 하지 않을까.

이번 사건이 어떤 여파를 남기게 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수년 전의 학교 폭력 사건처럼 그대로 잊혀질지, 아니면 개선을 위한 어떤 시도의 계기로 작용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한국 야구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구단이 세상에 내놓은 ‘지명 철회’라는 네 글자가 소위 ‘개선’의 전부를 갈음하게 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한국 야구는 앞으로도 계속, ‘반쪽 선수’들밖에 내놓을 수 없는 ‘반쪽 야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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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31, 2020 at 08:48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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