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폭행 사건의 피해자 ㄱ씨(32)가 경향신문에 16일 입장문을 보내 “망망대해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라고 호소했다. 전날인 15일 피의자 이모씨(32)에 대한 두 번째 구속영장이 기각된 데 따른 반응이다.
ㄱ씨는 입장문에서 “15일, 일명 ‘서울역 묻지마 폭행’ 가해자의 2차 영장심사 결과가 발표됐다. 결과는 참담하게도 또 기각이었다”며 “끔찍한 사고가 이미 터졌는데 (피의자가) 반성한다면 용서가 된다니 충격”이라고 했다. 이어 “무고한 시민을 이유없이 폭행하고 위협한 후, 그저 ‘반성합니다’라는 가벼운 말로 무거운 죄를 덮을 수 있다는 현실이 좌절스럽다”고 했다.
ㄱ씨는 지난달 26일 오후 1시50분쯤 공항철도 서울역에서 이씨에게 폭행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ㄱ씨는 왼쪽 광대뼈가 함몰되고 눈가가 찢어지는 피해를 입었다. 이씨는 사건 발생 직후 도주했다. 사건 발생 일주일 뒤인 지난 2일 철도특별사법경찰대는 경찰과 함께 이씨를 자택에서 긴급체포하고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법원은 4일 이씨에 대한 영장을 기각했다. 재판부는 “수사기관이 피의자 신원과 주거지 및 휴대폰 번호 등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고, 피의자가 주거지에서 잠을 자고 있어 증거를 인멸할 상황도 아니었던 만큼 긴급체포가 위법하다”며 “위법한 긴급체포에 기초한 이 사건 구속영장 청구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기각 이유를 설명했다. 이후 철도경찰이 구속영장을 재청구했지만 법원은 15일 피의자에게 증거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다시 기각했다. 법원은 “이 사건은 여성혐오에 기인한 무차별적 범죄라기보다 피의자가 평소 앓고 있던 조현병 등에 따른 우발적, 돌출적 행위로 보인다”며 “피의자도 스스로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있다”고 했다.
ㄱ씨는 “피해자들이 속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현병과 반성의 태도를 핑계 삼는 피의자와 그 가족의 후안무치한 태도는 앞으로 이런 류의 사건을 더욱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확산시킬 수 있음을 감히 말씀드리고 싶다”며 “‘공정하고 정의롭고 안전한 대한민국’의 모습이 맞느냐”고 물었다. 이어 “피의자가 반성하고 있음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며 “우발적 범죄는 엄중한 처벌이 없다면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우발적이라서 더욱 심각한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ㄱ씨는 “퇴원 후 정신과 방문을 위해 처음으로 외출에 나섰을 때, 가해자와 비슷한 인상착의의 남성을 보면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도 모르게 몸을 피하게 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물을 쏟았다”면서 “누군가 또 제게 이유 없이 시비를 걸고 폭행을 저지를까 두려움을 느꼈고, 피해자의 안위는 어디에서도 보호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참담함을 느꼈다”고 했다. 이어 “걱정 없이 거리를 다니거나 편안한 마음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게 됐고, 밤에는 신경안정제 없이 잠에 들지 못한다”며 “망망대해에 철저히 혼자 남겨진 기분”이라고 덧붙였다.
이하 ㄱ씨가 경향신문에 보낸 입장문 전문
6월 15일, 일명 “서울역 묻지마 폭행” 가해자의 2차 영장심사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결과는, 참담하게도 또 기각이었습니다. 오늘 발표된 판사님의 기각 사유는 주로 가해자의 ‘반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가해자가 도주 우려가 없으며 조현병에 의한 ‘우발적인’ 범죄이고, 충분히 반성하고 있고 가해자의 가족들이 추후에 재범 방지에 노력할 것이라 밝혔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끔찍한 사고가 이미 터졌는데 반성한다고 하면 쉬이 용서가 된다니, 충격적입니다. 저 외의 다른 피해자들은 그간 용기 내어 가해자의 범행을 알려왔습니다. 무서웠습니다. 혹시라도 우리를 찾아와 보복할까봐, 혹은 또 다른 범죄가 일어날까 두려웠습니다. 그렇지만 스스로의 억울함과 분노를 무릅쓰고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누구도 저희를 보호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고한 시민을 이유 없이 폭행하고 위협한 후 그저 ‘반성합니다’라는 가벼운 말로 가해자의 무거운 죄를 덮을 수 있다는 현실이 저는 좌절스럽습니다.
조현병을 앓고 있다는 가해자의 ‘우발적인’ 행동으로 인해 저는 아무 이유도 없이 대낮에 서울역에서 안경을 쓴 채로 폭행을 당해 눈가가 찢어져 흉터가 남았고 광대뼈가 함몰되어 수술을 받았으며, 병원에 오랜 시간 입원해야했고 정신적인 충격으로 정신과 상담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다른 피해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만큼 기각 사유는 충격적이었고 피해자를 고려하는 법의 태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저 가해자의 반성을 두둔하는 말 뿐이었습니다.
며칠 전, 퇴원 후 정신과 방문을 위해 처음으로 외출에 나섰습니다. 가해자와 비슷한 인상착의의 남성을 보면 소스라치게 놀랐고 저도 모르게 몸을 피하게 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물을 쏟았습니다. 누군가 또 제게 이유 없이 시비를 걸고 폭행을 저지를까 두려움을 느꼈고, 피해자의 안위는 어디에서도 보호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또한 제게 또 다른 고통을 주고 있는 악플러들의 밑도 끝도 없는, 저와 제 가족을 조롱하는
2차 가해성 댓글들이 떠올라 괴로워해야 했습니다.
재판장님, 감히 여쭙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가해자가 반성하고 있음을 과연 어떻게 믿으십니까?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피해자인 제게 증명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말씀하신 ‘우발적인’ 범행은, 엄중한 처벌이 없다면
결국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발적’이기에 더욱 심각한 범죄로 커질 수 있습니다. 이미 저 말고도 다수의 피해자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실 것이며, 이 사건의 1차 기각 이후 사회적 약자를 타겟으로 한 ‘묻지마 폭행’이 계속해서 한국사회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으며 무엇보다 연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에 무고한 시민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현실도 이미 인지하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속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현병과 반성의 태도를 핑계 삼는 피의자와 그 가족의 후안무치한 태도는 앞으로 이런 류의 사건을 더욱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확산시킬 수 있음을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해자가 조현병을 오래 앓았다고 들었습니다. 그 가족들이 이 사실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 정도로 심각했다면 어떻게 가해자를 서울에 혼자 방치하고 이토록 많은 피해자들이 생기게 방관했을까요?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가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겠지만 그저 가만히 있다가 봉변을 당한 피해자는 도대체 어떻게 억울함을 풀고, 보호를 받고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제게 남은 몸과 마음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습니다. 저희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술 후 저는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병실이 떠나가라 통곡했습니다.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 하면 너무도 억울하고 두렵고 분해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하지만 두 번의 기각 소식을 듣고, 저와 가족들은 다시 억울함에 가슴을 쳐야 했습니다. 저는 당분간 걱정 없이 거리를 다니거나, 편안한 마음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또한 밤에는 신경안정제 없이 잠에 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제가 생각하고 믿었던 ‘공정하고 정의롭고 안전한 대한민국’의 모습이 맞습니까? 저와 저를 비롯한 피해자들은 이제 과연 어디에서 어떻게 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요. 또한 연이어 발생하는 ‘묻지마 폭행’의 피해자들은 어디에서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을까요.
긴 싸움의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는 많이 지쳤습니다. 망망대해에 철저히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듭니다. 오늘 밤도 역시, 참담하고 억울한 마음에 쉬이 잠들지 못할 것 같습니다.
June 16, 2020 at 01:4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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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폭행 피해자, 2차례 영장기각에 "망망대해에 철저히 혼자 남겨진 기분"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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